“머리로 어렵게 쓰는 시 넘어서야 한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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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평론가, 김언희 시 조명
시, 무엇보다 전율·감동 있어야
독자 내쫓는 난해한 시 지양
부산 모더니즘 풍토 쇄신 필요

전무후무한 시를 쓴다는 김언희의 시 정신으로 머리로 쓰는 어려운 시를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부산일보 DB 전무후무한 시를 쓴다는 김언희의 시 정신으로 머리로 쓰는 어려운 시를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부산일보 DB

부산 경남, 아니 진주에 김언희 시인이 ‘있다’. 지역에 그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복락이다.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걸 다 내던져 쓰는 시인이다. 지역 시인들에게 김언희는 하나의 전범이다. 무엇보다 그는 무서운 시인이다. 그가 시의 질료로 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시에서 그는 칼날처럼 구사한다. 독자의 살도 베고 그의 살도 베어 시의 안쪽을 그는 보여준다. “생선 배를 가르듯이 인간의 불가해한 영역을 갈라 보이는 시는 불가능한가”라는 물음에 그의 시적 지향이 들어 있다.

<경남문학> 2023년 겨울호에 문학평론가 송희복이 김언희 시를 다룬 ‘성적 욕동과 추악의 수사’란 글에서 하나의 문장을 부려놓았다. “김언희 이전에 김언희가 없었고, 김언희 이후에 김언희가 없었다.” 그렇게 김언희는 전무후무하다는 것이다.

송 평론가는 “(김언희 시는) 이전의 여성시 대부분을 내숭으로 만들었고, 이후의 여성시 상당수를 아류로 만들어버렸다”라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문장을 더욱 다듬는다. 송희복은 그 문장을 더욱 밀어붙여 “김언희 이전의 여성시는 내숭이었고, 김언희 이후의 여성시는 아류였다”고 예각화한다.

‘벼락을 맞는 동안//나무는 뭘 했을까//번개가 입속으로//치고 들어가 자궁을//뚫고 나오는 동안//벼락에 입술을 대고’(‘벼락 키스’ 전문). 이렇게 벼락 맞는 순간 같은 것이 김언희의 시에 있다. 그걸 송희복은 ‘불가사의한 매혹의 오르가슴’이라 표현한다.

왜 김언희 시인인가. 지역 시인들이 머리로 어렵게 쓰는 시를 넘어서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가슴으로 어렵게 쓰는 시가 있다면 그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시인은 무당”이라는 김언희의 말처럼 그의 시는 귀기를 품고 있다. 물론 시인 모두가 무당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시에, 시행에 독자를 전율하게 하는, 사로잡는 그 무엇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즈음 지역 시에서 부족한 점이라는 게 평론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머리로 쓰는 어려운 시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언희는 “시인은 시를 30~40% 쓰고, 독자가 나머지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독자가 쓴다”라는 말은 “독자가 전율로, 감동으로 반응해야 한다, 정서적 반응을 통해 그 나머지를 채워야 한다”는 것의 다른 소리다.

그런데 머리로 쓰는 시는 감동을 주기는커녕 이해도 어렵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렵게 쓰는 시는 독자를 염두에 둔 시가 아니라 비슷하게 쓰는 특정한 상대의 시인을 염두에 둔 시라는 혐의가 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하고 고립된 방식의 시 쓰기라는 지적이다. “나는 이렇게 어렵게 쓴다. 한 번 읽어내 봐라”고 하니 독자가 들어갈 틈이 좁거나 아예 없어 안 읽고야 마는 것이다. 40여 년 시를 썼다는 한 시인은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시행을 너무 많이 본다”고 지적했다.

지역 시단에서 이런 시들이 많다면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로 어렵게 쓰는 시는, 시의 입지를 스스로 고립시키는 한편으로, 매달 두서너 명의 신인을 배출하는 월간지가 있는 것처럼 너무 쉽게 쓰는 시인들의 양산에 자리를 깔아주는 측면도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부산의 경우 모더니즘 시가 강세라는 분석이 있고, 부산 시단의 요즘 대세는 모더니즘 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부산은 복잡한 근대적(modern) 삶의 도시이니까, 그 속에서 사는 이들이 자연스레 모더니즘 시를 많이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산 산복도로에 1층 우체국, 2층 슈퍼, 3층 교회, 4층 목욕탕 식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건물에 들어가 있는 모습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 비틀기의 언어를 한 데 집어넣어 구사하는 것이 모더니즘 시의 전략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시의 난점은 어렵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 난점을 극복하는 것은 가슴으로 쓰기인데 머리로 더욱 밀어붙여 난처하게도 난점의 탑을 쌓아올리는 것이다. 김언희는 “시는 독자의 상상력에 대한 방화를 노리고 그어 던진 한 개비의 위험한 성냥”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비추어 어려운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한 개비의 위험한 불붙은 성냥을 던졌냐고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즈음의 풍토다. “김언희 이전에 김언희가 없었고, 김언희 이후에 김언희가 없었다”는 것은 오를 수 없는 성채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관성적인 둔탁한 시 쓰기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새로운 시 쓰기에 대한 도전의 유혹이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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