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 당한 베를린 교회, 복원하지도 허물지도 말라 [세상에이런여행] ⑨ 업사이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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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낱말 (6) 업사이클링-끝>

2차 세계대전 때 파괴 빌헬름 카이저 교회
무너지고 불에 그을린 자국 곳곳에 선명히
아픈 상처 기억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

황폐화 도쿄 오모테산도 쇼핑몰 재개발 때
한가운데 낡은 아파트 손대지 않고 남겨둬
추억, 흔적 겹친 이종교배 건축물로 인기

버린 재료로 가방 만드는 스위스 프라이탁
취리히 사옥도 중고 컨테이너 업사이클링

독일의 수도 베를린만큼 사연 많은 도시가 또 있을까.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죗값으로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돼야만 했다. 당초 기준대로라면 베를린은 사회주의 진영인 동독의 영토에 속했지만, 역사적 상징성과 문화적 중요도 때문에 자유주의 진영은 쉽게 베를린을 내어 줄 수 없었다. 결국 도시를 반으로 나누는 장벽이 세워져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대치하며 냉전 시대를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훗날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베를린 장벽도 함께 허물어졌는데, 그때부터 베를린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며 자유와 화합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그대로 남겨진 독일 베를린의 빌헬름 카이저 교회. ⓒ박 로드리고 세희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된 그대로 남겨진 독일 베를린의 빌헬름 카이저 교회. ⓒ박 로드리고 세희

지금에 이르러선 그마저도 옛이야기가 돼버렸고, 이제 베를린은 힙스터의 성지라 불리며 유럽에서 가장 핫한 도시로 손꼽힌다.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현대 예술의 중심지가 된 건 물론이고, 최신 유행을 이끄는 클럽과 카페, 레스토랑이 즐비한 도시가 된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이 제아무리 예술과 트렌드라는 새 옷을 입었다 해도, 여행자의 눈에 가장 빛났던 지점은 아픈 상처를 기억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당국과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철거하지 않고 일부러 남겨놓은 베를린 장벽의 잔해가 곳곳에 전시돼 있고, 유대인 박물관을 비롯해 홀로코스트 기념비 등 자신들이 범한 잘못을 시인하고 기억하며 추모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건 빌헬름 카이저 교회다.

베를린 최대의 번화가에 자리 잡은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첨탑이 무너져 내리고 교회당 곳곳이 파괴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어도 베를린은 이 교회를 복원하지 않았고, 마저 허물지도 않았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는 전쟁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 위해, 폭격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한 것이었다.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한 빌헬름 카이저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폭격 당해 쓸모를 다한 교회를 가만히 놔두어서 세상의 어떤 건축물도 흉내 내지 못할 의미를 부여한 지혜가 소름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일본 도쿄의 오모테산도 힐스 쇼핑몰. 가운데 하얀색 낡은 부분이 옛 아파트다. 오모테산도 힐스 페이스북 일본 도쿄의 오모테산도 힐스 쇼핑몰. 가운데 하얀색 낡은 부분이 옛 아파트다. 오모테산도 힐스 페이스북

일본 도쿄에도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낸 건물이 있다. 날로 인기를 더해가는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모테산도 힐스’라는 쇼핑몰이다. 과거 오모테산도 지역은 황폐화돼가던 곳이었는데, 지역 한가운데엔 아주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다. 재개발을 하는 데까지는 의견을 모았으나, 개발 방식을 놓고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오랫동안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때 안도 다다오가 극단적인 리모델링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난국을 타개했다. 아파트를 허물고 쇼핑몰을 ‘재건축’ 하되, 아파트 한 동은 허물지 않고 새로 지은 건물과 연결해서 ‘리모델링’ 하자는 것이었다. 현대적인 쇼핑몰 한쪽 끝에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오래된 아파트가 붙어있는 다소 파격적인 설계안이었다. 주민들은 반신반의했으나, 안도 다다오의 집요한 설득 끝에 결국 사업은 진행되었다. 그래서 번듯한 쇼핑몰에 오래된 아파트의 추억과 흔적이 겹쳐 있는 이종교배 건축물이 탄생했다.

오모테산도 힐스 쇼핑몰이 개장하자 낯설고 독특한 아이디어가 구현된 건물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며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치게 됐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주변에 플래그십 매장을 열기에 이르렀고, 폐허 같았던 오모테산도 지역은 이제 도쿄의 쇼핑 랜드마크가 됐다. 모두가 허물어야 마땅하다고 여긴 건물을 이야기를 품은 쇼핑몰로 만들어낸 천재 건축가의 기지는 다시 생각해봐도 놀랍기만 하다.

빌헬름 카이저 교회와 오모테산도 힐스가 가진 공통점은 각기 다른 이유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장소가 지금 누리는 위상은 그 어떤 건물도 따라가지 못할 만치 높다. 그것은 리모델링과는 다른 개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버려진 것을 남겨진 것으로 전환하며 가치를 발굴한, 이른바 업사이클링(Upcycling)이었다. 재활용을 뜻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에 업그레이드(Upgrade)가 합쳐진 업사이클링은 버려진 물건을 단순히 재활용 하거나 용도를 변경해서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더해 이전보다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드는 일을 아우른다. 업사이클링의 가장 쉬운 예이자 가장 성공한 예를 들자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프라이탁 가방을 빼 놓을 수 없다.

업사이클링 회사인 프라이탁이 컨테이너로 만든 스위스 취리히 본사. ⓒ박 로드리고 세희 업사이클링 회사인 프라이탁이 컨테이너로 만든 스위스 취리히 본사. ⓒ박 로드리고 세희

프라이탁은 시한이 다 되어 버려진 재료들을 수거해서 가방을 만드는 회사다. 트럭 화물칸을 덮는 방수천, 자전거의 고무 튜브, 안전벨트 등이 재료가 된다. 버려진 재료들을 수거해 일일이 세척한 후 수작업으로 만드는 프라이탁 가방은 세상에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도 없기로 유명하다. 트럭 방수천의 문양이 제각각이고 재단되는 면 또한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방 하나마다 개별 공정을 거치는 덕분에 가격은 제법 고가에 속하는데도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팔린다. 스위스 취리히에 본사를 둔 프라이탁은 사옥마저 중고 컨테이너를 업사이클링해서 지었다. 덕분에 취리히는 도시를 대표하는 명소 하나를 더 가지게 됐다.

취리히를 다녀가는 수많은 여행자의 블로그나 SNS를 보면 한낱 가방 만드는 회사에 불과한 프라이탁 본사를 다녀간 것을 자랑하고 인증하는 데 여념이 없다. 재활용 재료로 만들었음에도 비싼 가방을 기꺼이 사고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붙은 컨테이너 건물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은 단지 취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업사이클링의 철학을 구매하고 방문한 것이다. 버려진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업사이클링은 환경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철거되지 않은 베를린의 교회와 도쿄의 아파트 한 동은 그만큼 건축폐기물을 줄인 것이고, 해마다 버려지는 수백 톤의 천막은 가방이 되었으니 말이다.

각종 천 제품을 업사이클링해 만든 의자. ⓒ박 로드리고 세희 각종 천 제품을 업사이클링해 만든 의자. ⓒ박 로드리고 세희

업사이클링은 환경오염을 줄이는 아주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방법이다. 유럽에는 업사이클링 제품만을 취급하는 편집숍이 더러 있고, 버려진 컨테이너로 만들었으면서도 힙한 상업 시설이 제법 눈에 띄는 것을 보면 트렌드인 모양이다. 반가운 흐름이다. 스스로를 환경주의자라고 자신 있게 외칠만한 사람은 못되지만, 업사이클링이 환경마저 보호한다고 하니,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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