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바람 부는 날 / 김종해(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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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시집 〈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1990) 중에서

사랑은 괴로운 일이기만 할까? 시의 화자는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일이라 했다가 끝내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일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사랑하는 일이나 사랑하지 않는 일 모두 고통스럽다 말하고 있지만, 문맥의 흐름상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괴로운 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랑의 본질 자체를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 속을 나아가는 행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함으로 ‘일방통행의 외길’을 걷는 것은 쓸쓸한 일이지만, 사랑으로 인해 나는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즉 존재의 각성에 해당하는 ‘의식의 불꽃’을 갖게 된다. 이 허황한 세상천지에 가슴 한 편을 달구어주는 ‘밀감빛 불꽃’은 얼마나 큰 존재의 위로이랴! 하여 사랑하는 일은 인식의 깨어남이자 존재의 도약이다. 김경복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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