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인연] 갯마을에 스며든 돼지국밥 깊은 맛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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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경력 일식 셰프의 일광돼지국밥 홍가
시원한 맛 일품인 아롱사태 냉채에 '깜놀'

'일광돼지국밥 홍가'의 섞어국밥 '일광돼지국밥 홍가'의 섞어국밥

수육 중짜. 수육 중짜.

달음산과 아홉산에서 발원한 일광천 물줄기가 제법 옹골차다. 동해선 일광역에서 내려 일광천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일광해수욕장 입구에서 문학비 하나를 만난다. 난계 오영수의 갯마을 문학비다. 비문엔 갯마을 아낙 해순이 후리막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맨발에 식은 모래가 해순이는 오장육부에 간지럽도록 시원했다.'

일광은 신도시가 들어선 지 오래지만, 그래도 해수욕장과 인근 풍경에는 갯마을의 여운이 남았다. 장어 요리를 내는 집도 아직 많은데 이곳이 워낙 짚불로 구운 꼼장어나 붕장어 회 등의 해산물이 강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광풍으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붕장어 구이집 '동해남부선'이 있어 서너 번 일광을 찾았지만, 부산 구도심에 사는 이에게 일광은 어젼히 멀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런데도 굳이 일광을 다시 찾은 이유는 이 갯것 중심의 판에 감히 명함을 내민 돼지국밥집이 있다고 해서다.

'일광돼지국밥 홍가' 젊은 사장은 홍 씨였다. 홍상우 사장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정통 요리 전문 과정을 거쳤고, 15년간 부산 유수의 호텔에서 일식 세프를 지냈다. 그런데 초밥 같은 일식이 아니라 돼지국밥집을 최근 이곳 일광에 열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홍 사장이 돼지국밥집을 연 이유다. 알듯 말듯 선문답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일광돼지국밥 홍가의 아롱사태냉채 한 점을 입에 넣은 후에는 굳이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일광돼지국밥 홍가의 시그니처 메뉴 아롱사태 냉채. 일광돼지국밥 홍가의 시그니처 메뉴 아롱사태 냉채.

'오이를 얇게 썬 위에 아롱사태 수육이 놓이고 그 위에 홍고추를 활용한 특유의 소스와 가늘게 썬 파를 뿌렸다.' 부산 외곽, 기장군 일광의 돼지국밥집에서 고급 중식 요리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 참, 이 집 사장이 호텔 요리사 출신이지.'

보통 돼지국밥집에는 새우젓을 내놓는다. 그런데 이 집은 새우젓이 없다. 대신 새우젓 무침이 제공된다. "새우젓은 질펀한 물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새우젓은 따로 양념을 가해 무쳤고요. 양념장(다대기)을 만들 때 미리 새우젓을 넣어 이미 초벌간이 돼 있습니다. 기호에 따라 구운 소금을 조금 추가하면 간이 됩니다."

새우젓 무침은 수육을 먹을 때 막장(쌈장)과 버금갈 정도로 위력을 발휘했다. 물기 없는 새우젓 무침을 수육 한 점에 살짝 올린 뒤 먹으니 궁합이 딱 맞다.

새우젓 무침 새우젓 무침

구운 소금 구운 소금

돼지국밥이 거기서 거기라지만, 양념 한 가지나 어떤 고기를 쓰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다르다고 한다. '시골 국밥'치고는 단가가 살짝 있어 너무 비싸게 받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조금 그런 느낌이 있지만 정직하기 위해서란다. 원재룟값을 비롯한 모든 물가가 올랐다. 좋은 고기를 써야 좋은 국밥이 탄생하는데, 국밥과 수육의 품질을 포기할 수 없어 적정 선으로 가격을 정했다고 홍 사장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항정살이 듬뿍 담긴 일광돼지국밥 홍가의 수육 중짜. 항정살이 듬뿍 담긴 일광돼지국밥 홍가의 수육 중짜.

수육 중짜를 시켰다. 항정 수육이 절반 가까이 나왔다. 항정살은 고급 부위로 알려져 있는데, 돼지 수육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수육은 온기가 유지되도록 고체연료 화로 위에 놓아준다. 일식 세프의 센스다.

맛보기 순대도 잘 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지리산 산행을 갔다가 산 아래 사람들이 동네 잔치를 하면서 순대를 만드는 것을 봤다. 그런 전통 방식으로 만든 시골 순대가 맞다.

술과 고기를 먹었지만, 그래도 국밥을 맛봐야 했기에 섞어국밥을 시켰다. 내장과 수육이 골고루 섞여 푸짐했다. 일광돼지국밥 홍가는 사골과 고기 육수를 섞어 국물을 낸다고 했다. 진하고 뽀얗지도 않고, 투명한 듯 맑지도 않은 균형을 갖췄다. 수육만 시켜도 국물은 각각 따로 나온다.


맛보기순대. 맛보기순대.

한여름에 돼지국밥집 개업이 무리수가 아니었냐는 불편한 질문을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시세끼 식사가 되도록 문을 엽니다. 현재까지는 연중무휴입니다." 오전 8시에 문을 열고 오후 8시에 문을 닫는데 3끼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단다. 마지막 주문은 오후 7시 30분까지 받는다.

홍 사장은 새벽부터 당일 쓸 사골을 끓이고 수육을 삶아낸다. 마침 40년 한식 조리사 고모부가 도와주고 있어 숨통이 트인단다. 고모부는 부산 요식업계에서는 이름만 말해도 사람들이 아는 김판철 전 부산조리사협회장이다.


고체연료 위에 얹어주는 수육 접시. 고체연료 위에 얹어주는 수육 접시.

그러고 보니 여느 돼지국밥집과는 다른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홍 사장의 일식 마인드도 보태져 돼지국밥집 내부는 멋진 카페 같은 분위기다. '일광 갯마을의 돼지국밥' 홍 사장은 비록 일식 셰프였지만, 부산 토박이로 어릴 적부터 돼지국밥을 즐겨 그 DNA를 잘 간직한 사람이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이 번창하리라.

가게는 동해선 일광역에서 걸어 5분 거리인 동부산농협 일광지점 건너편에 있다. 거리 이름이 이천갯마을낭만거리다. 돼지국밥에 온몸이 얼큰해지면 갯내 물씬 나는 바닷가가 또 지척이니 여기서 시원하게 식혀 오면 된다.

국밥류 9500원, 수백과 특선은 각 1만 2000원. 순대맛보기 6000원, 수육 중짜 2만 5000원, 아롱사태냉채 1만 5000원이다.

일광돼지국밥 홍가 메뉴판. 일광돼지국밥 홍가 메뉴판.

돼지국밥집 내부 벽면 장식물. 돼지국밥집 내부 벽면 장식물.

일광해수욕장 풍경. 일광해수욕장 풍경.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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